2014. 7. 1. 01:05

언제부터 자신이 존재했는 지 모른다. 그에겐 이름이 없었다. 그는 거적데기를 걸치고, 원하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들이 놀라 나자빠지는 것을 보며 웃는 것조차 그들은 무서워했다. 그에게 그것은 즐거운 일일 뿐이다.


그에겐 형체가 없었다. 걸을때에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고, 흩날리는 천아래 드러난 것은 뼛조각이었다. 또는 아무것도. 그는 자신만의 온전한 형체를 가지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모습은 언제나 자유로웠다. 언젠가는 그들이 아는 사람으로, 누군가의 이상형으로, 또는 전혀 알 수도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 필멸자라 불리는 그들의 반응을 즐겼다.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은 풀더미를 디딘채, 바람이 바슬거리는 감촉을 느끼며 하늘을 보는 것이다. 색이 변하는 모든 과정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사랑한다.


나무위, 여러개의 선. 그는 그것을 볼 때부터 무엇을 해야하는 지 안다. 자각을 가지기 전에도 알던 것이다. 누군가 제 앞에 올려놓는 돌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안다. 그는 바람같은 미소를 띄고, 제 손위에 덮인 모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 앞에 놓이는 돌을 바라보며 턱을 괸다. 그에겐 아무런 표정도 없다. 상대는 머지않아 수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그가 모든 수를 보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떨군 상대를 바라보는 표정은 언제나 평온하다. 그는 형체조차 없었지만, 그를 스쳐보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루였다.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이 여물어 질 때까지. 모든것은 단지 그에게 지나쳐가는 것조차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에 감흥이 없었다. 하늘이 변하는 것이 하루인 것을 모른다. 그가 모든 사고를 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또 다시, 그에게 하루였다. 온 몸을 두른 천 사이로, 그는 한 어린것을 보았다. 핏덩이라기엔 지나치게 크고, 어린아이라기엔 하는 모양새를 알 수가 없다. 저보다 못한 거적데기를 걸친 것은 노란귀신에게 앞머리를 잡아당겨지고 있다. 노란 귀신은 킬킬거리고 있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화를 낸다. 상황이 우스웠다. 형체도 없이 그가 바위에 내려앉았다. 턱을 괸다, 이를 악문채 귀신의 손을 잡은 어린것을 보았다. 언제쯤 저 아이의 머리가 뽑힐까. 귓가에 닿은 손이 바르작거리며 뼈를 울린다. 마침내 아이가 처음으로 비명을 멈췄다. 놀랄 것도 없이, 머리가 박살난 것은 제 발에 눌린 노란 귀신이었다.


" 물러가야지, 그래. 너 말이다. 물러가거라. "


흩어진 것은 감히 위를 올려다보지 못했다. 부스러기들이 땅으로 스며들었다. 노란흔적이 땅 위에 남았다. 머리를 감싸안던 아이의 머리 위에 그가 손을 얹었다. 발치에 고개숙이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의 일도 있겠지만, 제 머리위에 놓인 손이 뼈였던 탓이다. 머리를 덮은 모포가 벗겨지고, 그가 이빨을 달달거리며 웃었다. 그는 아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한 순간의 여흥이다.


" 왜 그것이 너를 해치려 한것이냐? "

" 나, 난 그냥 걷고있었어. 밟은 것도 몰랐다고. "


방금 밟은 머리와 같았다. 그는 아이에게 큰 감흥이 없다. 아이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도 말을 토해냈고, 그는 그것을 듣는다. 손을 움직였다. 두피에 닿는 생생한 뼈의 감촉에 어깨를 움츠린다. 그럼에도 아이는 위를 쳐다본다. 다시 덜덜거리는 웃음이 울린다. 아이는 그제야 제 머리카락을 본다. 노란색이다. 아이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갑자기 내뱉는 비명을 그는 여전히 보고 있다. 아이는 이제 씩씩거리고 있었다.


" 세상에, 머리카락이 노란색이야! "

" 글쎄, 정확히는 완전한 노란색은 아니지. "


그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제야 앞발에 걸리는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보았다.


" 안돼, 이건 너무 이상하잖아. 귀신같이 보여. "

" 그게 그렇게 이상해? "

" 당연하지! "

" 그래? "


소리치는 괴성이 어린아이의 것이라기엔 쩌렁쩌렁했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새 그는 손바닥을 뗀 채였다. 아이는 불안한듯이 주위를 맴돌며 앞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뼛다귀였다. 그는 제 몸을 살점을 입힐 수 있는 자이다.


아이는 아직 모포에 가려진 것이 변하는 걸 보지 못했다. 머리위에 내려앉는 것이 익숙했다. 아이가 고개를 든다. 아까까지 제 앞에 있던 뼛다귀는 살을 입었다. 사내였다. 지금의 제 모습과 머리카락색이 똑같은. 아이는 여전히 작았고, 그는 여전히 아이가 무릎에 닿았다. 때는 낮이었다. 사내의 뒤로는 빛이 비치고 있었다. 아이는 그 사내가 드리우는 그늘아래 존재했다. 빛을 등지는 미소를 볼 수 있었다.


" 그럼 이건 어떠냐? "


그에겐 어떠한 의도도 없다. 그것에 아이가 웃었다. 제 머리위에 얹은 손을 마주잡았다. 그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우습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아이는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좋다고 말했다.








아이가 손을 잡으려면 팔을 힘겹게 들어올려야 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한 번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발에 닿는 모래가 자글거린다. 가끔씩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아이의 눈을 괴롭힌다. 아이는 불편하게도, 잡은 그의 손으로 제 눈가를 문지른다. 그는 굳이 그 손을 떼어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유가 되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없이, 아이의 말을 들으며 걸었다.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듯 아이는 계속 이야기를 뱉어냈다. 며칠 전에 심은 사과나무는 어쩐지 시드는 것 같고, 이제는 서재의 두번째 책장에도 까치발로 닿을 수 있으며, 저보다 한살 많은 오쿠다라는 녀석의 코를 깨버렸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그가 멈춰섰을 때, 아이도 발을 멈췄다. 그는 마치 처음보는 사람을 대하듯 예의바르게 말했다.


" 너를 뭐라 부르면 좋겠느냐? "

" 히카루. "


처음으로 하는 말처럼 히카루가 활발하게 대답했다. 히카루, 그가 이름을 되새기듯 말한다.


" 형은 이름이 뭐야? "

" 없다. "

" 형은 일본인이야? "

" 나는 그런것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야. 그래, 히카루. " 실망이 얼굴에 드리우자 그가 웃으며 말을 정정했다. 그제야 히카루의 표정이 풀어진다. 까치발을 해서야 완전하게 잡히는 팔을 신나게 흔든다. 그는 그런 행동을 만류하지 않았다. 


" 그럼 형이라고 부르면 돼? "

" 좋은 방법같지는 않은데. "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히카루에겐 아직 어려운 문제일지 모른다. 골똘히 생각하는 자의 머리를 헤집으며 그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태양의 신이 태양마차를 끌고 지나치는 것이 보인다. 바다와 바다의 끝보다도 먼 곳에서 구름의 신의 하품에서 피어나는 뭉게구름이 보인다. 바람의 신이 웃음과 바람을 내쉬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했고, 알려하지도 않았다. 손에 닿는 머리카락은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히카루를 내려보았다.


" 네가 부르고 싶은대로 해도 좋다. 너와 있을때는 그 이름으로 하겠다. "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듯, 히카루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살아온 것에 비하면 부스러기 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나뭇잎이 바닥에 떨어지는 시간과 같을 뿐이다. 단지 그 정도일 뿐이다. 한낱 필멸자에게 불리는 이름따위는 어찌되던 상관없었다.


" 그럼 히카루라고 부를래. "

" 그건 네 이름이 아니냐? "

" 나랑 똑같은 모습으로 있어준거잖아. 그러니까 히카루라고 부를래. "

" 좋다. " 히카루라 불린 자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 네가 좋다면 그렇게 하거라. "







히카루는 어린 이를 상관하지 않았다. 이는 히카루가 히카루의 손을 잡고 흔들거나, 모포끄나풀에 매달리거나, 저를 따라오는 것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히카루는 아주 오래토록 걸었다. 어린 자가 따라오지 못할만큼 한참을 걸었다. 그럼에도 히카루는 잡은 손을 놓지않고 꾸역꾸역 따라왔다. 쉴새없이 조잘대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이내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어린 발에 물집이 잡혀 발을 저는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히카루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건 손을 잡으려 까치발을 하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풀숲데기에 발이 스치는 소리가 난다. 그제야 히카루가 걸음을 멈추고 히카루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색색거리는 숨을 애써 참고 있다. 잡은 손을 받침삼아 몇 번이고 꾸벅거리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히카루는 한참동안이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히카루는 그것을 여전히 모른다.


" 그래, 너에겐 잠이 필요하지. "


아이가 눈을 들었을 때 허공으로 들어올려지는 거적데기를 보았다. 손이다. 나무들이 비껴나있는 땅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그 짧은 시간에, 제 눈 앞에는 늙은 나무들이 겹겹히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피곤함에 눈이 흐린 것을 몇번이나 비비며 히카루가 눈을 찌푸렸다. 자세히 보자, 그것은 집이었다. 나무로 된 집.


" 대충 이렇게 생겼던 것 같은데. "

확실하지는 않은 듯이, 그러나 영원히 평온할 목소리가 나무로 울려퍼진다. 손을 잡은 그보다는 어린 손이 들어올려진다. 아이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히카루가 히카루를 팔에 안았다. 가벼울 것도 없었다. 제가 걸을때와는 달리 히카루가 걸을적에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모포자락 아래에 드러난 발을 보며 히카루는 그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히카루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앞에 자리한 문은 열린다. 히카루가 걸음을 내딛어 그 안에 들어가자, 문은 저절로 닫혔다. 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안은 어두웠다. 그것이 필히 밤이기 때문만은 아닐것이다. 아이를 거둔 사내는 요란한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히카루는 제가 안은 것을 내려놓았다. 아이는 퉁퉁부은 제 발에 닿는 집 안을 보았다. 좁은 편은 아니었다. 아이가 뛰어놀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될 것이다. 문 반대편 벽에서는 타닥거리는 소리가 난다. 생전 처음보는 벽난로를 히카루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히카루가 히카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 넌 이제 자야한다. " 부드러운 명령이었다. 히카루가 구석에 쌓인 천들을 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차곡차곡 포개어 두툼하게 만들고 그것을 바닥에 깔았다. 히카루가 천을 톡톡 두드리자 히카루는 쪼르르 다가와 그곳에 앉았다. 누워야지. 아이는 시키는 대로 했다. 벽난로의 장작이 빨간것을 곁눈으로 볼 수 있었다. 누운 시야위로 비스듬히 창문이 보였다. 하늘은 어두웠지만 깨끗했다. 누운 제 옆에 자리했던 히카루가 일어나려는 것을 히카루가 잡았다. 히카루가 그를 돌아보았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무심하다. 모포를 잡은 손은 모래알갱이와 같다. 그보다 사막만큼이나 큰 사내가 모포를 내치듯 잡아올린다. 아이의 손은 너무나 간단하게 떨어졌다. 손에 걸린 모포의 끝자락을 영원토록 바라볼 것 같은 눈이 감긴다. 제 잠을 이기지 못한 터였다. 겹겹이 쌓인 모포에 널브러진 작은 온기가 있다. 히카루는 그 작은것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엎어진 자세로 잠이 들었다. 히카루는 히카루를 들어올렸고, 반듯하게 누이며 얇은 천을 덮었다. 그는 천조각을 가슴께에 놓고, 히카루의 몸에 댄 손을 위로 올렸다. 작은 목, 작은 뺨, 그리고 이마는 따듯했다. 그는 별 의미없이, 그의 옆에 누워 아이의 배를 다독였다. 그런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겐 여전히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아침이 되었다. 아이는 눈을 떴고, 벽에 기댄 사내를 보았다. 히카루가 방금 일어난 자와 눈을 맞춘다. 아이가 제게로 뒤뚱뒤뚱 다가왔다. 아직 발이 아물지 않은터였다. 어쩌면 사내는 일어나서, 아이를 부축해주거나 안아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제게 걸어오려 애쓰는 모습을 웃음을 띈 채 바라볼 뿐이다. 그의 눈은 여전히 평온했다. 마침내 제 앞에 다가와 같이 벽에 기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머리를 덮을만큼 크다. 히카루가 하품을 한다히카루는 걸어온 길을 돌아가지 않았다. 히카루는 그것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 정도의 의미일 뿐이다. 그는 제게 내민 손을 내치지 않았고, 그 뿐이었다. 히카루라는 이름을 불러줄 자가 더 이상 눈 앞에 없더라도 그가 그것에 절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이 필요했다. 그것을 히카루는 3일이 지나고, 아이의 말이 점차 줄어들었을 때까지 몰랐다. 오두막 옆에 자리한 시내에서 물을 마실 수는 있었으나 먹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히카루는 처음에 오두막에 있는 과일을 먹기도 했고, 주변에 나가 나무를 타고 열매를 먹어보기도 했다. 한 번은 시내에 헤엄치는 물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물이 저를 잡은 것만 같았다. 히카루가 물에 젖어 터덜터덜 돌아왔을 때 사내는 불씨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구부린채 그 위에 턱을 괴고,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나무막대기로 장작을 뒤적이고 있었다. 히카루는 처음으로 히카루에게 제 욕구를 말했다. " 배고파. " 사내가 천천히 히카루를 돌아보았다.


" 저런, 그것은 생각 못했구나. "


히카루는 일어났다. 그는 불 앞으로 걸어가,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이가 놀란 눈을 했다. 히카루는 약간은 낮았던 벽난로의 천장을 짚었다. 불씨가 히카루의 손에 튀었지만 묻지는 않는다. 그는 제 손 안에 담긴 물만큼이나 가볍게, 천장을 들어올렸다. 우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히카루의 팔이 완전히 펴질때까지 들어올린 손, 밀려난 천장. 히카루가 손을 뗏음에도 그것은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는 불쏘시개들을 집어들어 받침대를 만들고, 그 사이에 나무를 끼웠다. 그는 아이에게 솥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히카루가 뒤를 돌아보자 문 옆에는 양철로 만들어진, 약간은 찌그러진 냄비가 있었다. 히카루가 냄비를 가져오자 히카루는 그것을 나무에 걸었다. 솥 아래로 불이 일렁거린다. 히카루는 히카루에게 앉아있으라 말했다. 히카루는 그 말에 따랐다.


나무로 된 작은 식탁, 의자 두 개. 아이는 의자에 앉아 식탁에 얼굴을 대고는 사내가 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뭔가를 만드는 듯 했다. 히카루가 식탁위로 손을 뻗었다. 최대한 길게, 완전히 펴질때까지 뻗었음에도 제 손은 식탁의 다른 끝에도 닿지 않는다. 제 손이 최대한 닿을 수 있던 부분부터, 히카루는 손가락으로 나무에 난 무늬를 셌다. 히카루는 백까지 셀 수 있었다. 천천히 자기 쪽으로 손을 끌어들이며 숫자를 세었다. 열 하나, 열 둘. 마지막으로 센 숫자가 식탁의 끝이었다. 히카루는 열 셋까지 세었다. 그리고 제 눈앞에 히카루가 냄비를 내려놓았다. 신기하게도 자신이 최대한 손을 뻗었던 그 자리였다. 히카루가 국자로 무언가를 떠서 아이 앞에 내려놓았다. 나무 그릇안에 묽은 수프같은 것과 덩어리들이 떠다녔다. 모락모락 나는 김을 잡아내듯이 킁킁 거렸다. 히카루가 아이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준다. 사내가 먼저 수저를 들었다. 아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가 하듯이 숟가락으로 제 눈앞에 놓인 것을 먹었다. 덩어리를 씹었다. 사과였다.


" 맛없어. "


히카루가 혀를 내둘렀다. 히카루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아이에게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말문을 잃었던 그는 다시 국인지 스프인지 모를것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 배부른 소리하기는. "


그는 양배추를 씹었다. 소금 덩어리도. 확실히, 그의 첫 요리는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이르지만은 않은 시각이었다. 히카루는 벽에 기대어 제 모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히카루는 바닥에 턱을 괴고 누워 멀찌감치서 불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영원히 안주할 것만 같던 사내가 일어선다. 히카루의 눈이 그것을 쫓았다.


" 나갈 것이다. "


그가 문으로 다가가자 문이 열렸다. 히카루는 뒤쫓듯이 급하게 일어섰다. 오래괴었던 손목이 아프다. 히카루는 손목을 탈탈 털며 앞서나간 사내를 뒤쫓았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닫힌다. 히카루는 앞을 향해 걷는다. 히카루는 그를 뒤따랐다. 걷는 것, 밟는 것은 여러가지였다. 모래, 흙, 자갈, 풀. 그는 풀을 밟을 적에는 잠시 그 위에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히카루는 그의 시선을 따라 위를 보았다. 구름들과 하늘. 히카루는 손을 흔들었다.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히카루가 그를 따라했다. 히카루가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옆으로 늘어지던 그림자는 어느새 제 주변에만 머물러있다. 걷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히카루와 히카루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본 때이다. 히카루는 그의 모포를 벗었다. 그는 처음 보았던 사람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히카루는 분명 나설 적, 그의 다리를 보았지만 지금은 갈색 천으로 덮여있었다. 그의 손에서 떨어져나간 모포는 더이상 어디있는 지 알 수가 없다. 위를 향한 곁눈으로 보는 히카루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그가 걸어가자 주변 사람들은 그를 한번씩 돌아보곤 했다. 그들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향했다. 또는 반대로. 그들은 할 말이 있었지만 접힌 눈의 잔잔함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걸었고, 아이는 여전히 뒤따랐다. 마침내 그가 걸음을 멈춘 것은 정자 앞이었다.


" 여긴 어디야? "

" 글쎄. " 정자위로 올라선 히카루가 아이의 손을 잡는다. 아직은 올라가기가 힘겨운 탓이다. 손은 제 손바닥만으로도 덮을만큼 작다. 잡은 손을 세게 끌어당기자 아이가 정자위로 넘어진다. 히카루가 코를 감싸쥐었지만 히카루는 그것까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정자의 가장자리로 걸어가, 그곳에 놓여있던 견고한 나무 앞에 앉았다. 히카루가 이마를 문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 이것이 뭔지 아느냐? " 히카루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 오목두는 거잖아. 많이 둬봤었어. "

" 그렇구나. " 히카루가 눈을 감았다. " 그래, 이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


그가 바둑통의 뚜껑을 들어올렸다. 히카루는 잔잔히 밀려오는 파도처럼 그것을 내려놓고, 파도에 스러지는 모래알처럼 바둑알을 잡았다. 도드라지는 손 등의 뼈가 선명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그가 집은 것이 흰 돌이었다. 그는 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돌을 끼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자신이 자각하지도 못한 것이다. 바둑판 위에 돌을 올려두는 것. 그것을 바둑이라 부른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그의 앞에 다른 신이 나타날 때까지. 그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는 바둑의 신이라 불리는 자였다. 천천히, 그러나 느리지 않게 그가 바둑판 위로 돌을 내리친다. 탁. 선명하게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히카루는 그 소리를 모든 이들이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리친 돌을 밀었고, 교차된 선 위에 자리한 돌에서 그의 손이 떨어져나간다. 그의 손은 어느새 턱을 괴고 있다. 히카루와 히카루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목소리가 영험하게 울린다.


내가 하는 것은 이것이다. "










잠들 적에는 언제나 똑같았다. 히카루는 단지 아이가 잠들 때까지 곁에 머무를 뿐이다. 아이는 그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는 옆에 누운채 천장을 본다. 그는 곁눈으로 보지 않아도 아이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평소 히카루는 누우면 10분내로 골아떨어지곤 했다. 그가 움직이는 것이 적은 거리가 아닌 터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직 아이가 잠들지 않는다. 

옆에 누운 사내가 한 일을 떠올린다. 해가 제 머리 밑으로 떨어질 때까지였다. 그를 본 몇몇 이들이 정자위로 올라왔다. 히카루는 그 옆으로 물러났다.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히카루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 히카루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아한 인사였다. 아이는 그들과 사내가 하는 것을 본다. 간혹 히카루는 지루한 하품을 하고, 결린 다리를 주무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히카루는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히카루는 눈 앞의 광경을 오래토록 바라보고 있었다.


" 아까 한 게 뭐야? 바둑이라고 불러? "

" 지금은 그런 이름인 것 같구나. " 아이가 몸을 일으킨다. 히카루가 고개를 비스듬히 올렸다. 히카루의 시선이 향한 곳은 구석에 놓여있던 바둑판이었다. 히카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가져왔다. 히카루가 몸을 일으켰다. " 이걸 왜 가져온 것이냐? " 그가 조용히 물었다. 아이가 말했다.


" 히카루. 바둑 가르쳐줘. "

" 지금? 히카루. 시간이 늦었다. "

" 한 번이면 되잖아. 알려만 줘. " 히카루가 간절히 애원한다. 그의 신은 부드럽게, 나무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히카루의 표정은 완고하다. 그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한다. 그가 알았다고 말했다. 히카루는 졸린 것도 잊고 바둑통을 든 손을 공중에 몇 번 휘둘렀다. 그 바람에 바둑돌이 몇 개 쏟아졌지만 줍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히카루가 그것을 주우려 손을 뻗는다. 그러다가, 잠시 그가 손을 공중에 멈추고 생각을 했다. 어린아이는 히카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래, 이것으로 순서를 정해보자. 홀수이거든 네가 먼저 하거라. 짝수가 나온다면 내가 먼저 하마. "

어두운 밤이었다. 히카루는 제 옆에 초를 켰다. 불빛에 비친 떨어진 것은 흑돌이었고, 5개였다. 아이가 먼저 둘 차례였다. 아이는 아직 바둑을 모른다. 히카루는 엉성한 손놀림으로 바둑돌을 집어, 아까 그가 한 것을 떠올린다. 교차된 선에 그는 제 흑돌을 두었다. 이번엔 히카루의 차례였다. 그는 백돌을 집어 그 위에 놓았고, 히카루가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른다는 표정을 짓자 세 개의 돌을 더 집어들었다.


" 기본적인 법칙이다. 이렇게 흑을 백이 감싸거든 흑이 죽는것이지. " 히카루는 백돌로 흑돌을 포위한 뒤 죽은 흑돌을 들어올렸다. 공중에 들린 흑돌은 이내 놓인 바둑통 뚜껑 위로 떨어진다.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빙빙 울린다. 아이는 다른 곳에 놓인 제가 놓았던 흑돌을 바라본다. 그가 가운데 빈 공간을 짚으며 집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히카루를 보며 히카루가 백돌을 전부 그러쥐었다. 그건 종적을 감추는 것 같았다. 아이가 그의 신에게 묻는다.


" 그게 다야? 다른 건 없는거야? "

" 모든 것은 기본으로 처음을 시작한다, 히카루. " 그는 한 번 두겠느냐고 물었다. 히카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신은 제가 늦었다고 한 시간보다 더 늦은 시간까지 아이와 바둑을 두었다. 그는 제 무덤을 파는 단수에 놓는 손을 저지하기도 했고, 집을 계산하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단 한 번의 대국이었다. 아이는 엉성하게, 또는 엉터리로 처음부터 끝을 맺는다. 그들은 대국은 바둑판의 빈 틈을 메꾸고 있었다. 그에겐 바둑의 수준이 중요하지 않다. 그는 아이와의 대국을 흥미로워한다. 히카루는 아직 단 한번도 상대의 돌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의 신은 아이에게 맞춰 바둑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아이가 가진 집은 아직 열 집이 채 되지 않았다.


히카루가 바둑돌을 집었다. 그가 놓은 손은 단수를 조장하는 위치였다. 가로막힌 백돌은 먹을 필요가 없는 수였다. 히카루는 히카루가 놓은 수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앞으로 남은 바둑판 위의 자리는 두 개였다. 자신이 한 번, 아이가 한 번. 그는 제 돌이 먹히지 않도록 그곳에 돌을 둘 수 도 있었다. 아니면 아이에게 그 수는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히카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곳에 흰 돌을 두었다. 초의 불빛은 아주 약해서, 그가 웃는 것을 아이는 보지 못했다. 히카루가 흑돌을 빈 곳에 두었다. 사실상, 아이의 패배였다. 그러나 그 둘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히카루가 히카루를 올려다보았다. " 그래, 네 것이다. " 그제야 아이는 사내가 웃는 것을 보았다. 히카루가 그것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히카루가 백돌을 집어들었다. 어린 손을 히카루의 앞에 뻗었다. 자랑하는 손바닥 안에 놓인 백돌이 완연히 보인다. 그의 신은 말을 꺼내려 했다. 갑자기 그는 시선을 낮춰야만 했다. 처음으로 완성된 대국은 어지럽혀진다. 이것은 가히 기념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아이가 잠든 탓이었다. 촛불에 비치는 미소가 평소와 다름이 없다. 모포 자락이 펄럭거린다. 그가 일어났다.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히카루는 일어나서, 바둑판을 정리하기 위해 몸을 숙일 수 있었다. 또는 몸을 굽혀 아이를 모포에 눕힐 수도 있었다. 떨어지는 바둑돌을 주워 주변을 정리할 수도. 그는 생각하는 것들을 위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일어선 상태에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주홍빛이 옆 얼굴을 비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초의 불빛은 아이의 머리도 비추고 있었다. 미소는 점차 옅어진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의아함으로, 그리고 마치 충격과 같은 놀라움으로 눈이 커진다. 


그는 손을 내민 채 잠든 아이의 모습에서 갑자기 제게 엄습해오는 자애로움을 느꼈다.


마치 처음보는 것을 보듯이, 그것을 내려다본다. 오랜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초의 불이 꺼지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렸다. 히카루는 제 주변이 완연한 어둠이 될 때까지 히카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제게 찾아온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가 그것을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그는 그 아이의 옆에 무릎을 굽혔다. 왜 저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지 알 수는 없었다. 그의 눈은 이전에 단 한번도 그런 적 없이 다정하다. 그는 바둑판을 민다. 흩어진 돌들이 소리없이 떨어진다. 일어나 들어올리는 아이의 몸이 가볍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감싸안고, 모포에 작은 것을 뉘였다. 발치에 놓인 천을 가슴께까지 덮는다. 본 것인지, 제가 경험했던 것인지 모른다. 히카루는 히카루의 이마를 쓸어올리고, 그 위에 입술을 대었다. 따뜻하고, 살짝은 뜨거웠다. 너무 오래깨있던 터이다. 아이의 쥔 손이 풀어졌다. 흰 돌이 굴러떨어진다. 그가 입술을 댄 시간은 짧았지만 그것은 의미가 있었다. 분명한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 히카루, 일어나! "


히카루가 눈을 뜬다. 아이는 제 몸 위에 엎어져 발버둥을 치고 있다. 작은 무게라 한들 짐이 아닐 리 없다. " 일어났다. " 목소리가 사근하게 울린다. 묵직했던 배의 것이 땅으로 떨어져나간다. 히카루는 아침부터 신난듯이, 집 안을 뛰어다녔다. 매번 있는 일이었다. 한 번은 히카루가 그 이유에 대해 묻자, 히카루는 뛰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히카루는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다. 한참을 부산하게 돌아다니던 아이가 허기짐에 배를 감싸거든 사내는 일어난다. 땅에 닿는 손이 축축하다. 밤새 내린 비가 나무를 적셨다. 오두막 안에는 젖은 나무냄새가 난다. 사내는 그것을 좋아했고, 아이는 신기해했다. 히카루가 냄비를 집어든다. 어린 손이 낑낑대며 불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히카루가 잡는다. 그의 손길은 배려를 담고 있다. 아이는 제 손을 떠난 냄비에 개의치 않는다. 사내가 요리를 마치면 아이는 식탁 앞에 앉는다. 아이가 어설프게 숟가락을 잡는다. 히카루는 손을 바로 잡아준다. 아이가 스프를 떠먹는다. 히카루는 이제 제 손이 닿는 식탁의 가장자리까지 스프를 튀기진 않는다.


" 인간적으로 진짜 맛없네. " 

" 인간이 아닌걸 어쩌겠느냐? " 히카루가 턱을 괴어 웃는다. 아이가 숟가락을 떨어뜨린다. 비명이 오두막에 울려퍼진다. 아이는 칠칠맞게도, 식탁에서 일어나 뜀박질을 한다. 그럴만도 했다. 웃음을 거둔 히카루가 아이의 그릇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사내가 들어올린 팔은 식탁의 절반만을 덮는 손에겐 역부족이다. 히카루는 오늘 아침을 굶어야했다.






" 바둑은 좀 어려운 것 같아. " 아이가 모포를 만지작거린다. 히카루는 다리에 걸리는 아이를 내려본다. 그가 다리를 굽힌다. 아이가 코를 바닥에 찧는다. 나무는 야속하게도 소리를 흡수한다.


" 누구도 너에게 두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

" 나쁘진 않아. 그냥 좀 어렵다는 거지! " 아이가 쌓인 심통을 내지른다. 그의 신은 아이의 코를 매만진다. 주홍빛 비슷한 빨간색이다. 히카루의 얼굴이 풀어진다. 히카루는 히카루가 단순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것이 좋다. 창문으로 투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엎져있던 히카루가 단번에 일어난다. 그의 신이 아이의 발을 쫓는다. 히카루는 달려가 창문에 매달렸다. 굵은 빗방울에 창문이 흔들린다. 나무들의 끝에서 뭉친것이 물웅덩이를 만든다.


" 비가 엄청내려! 창문이 깨지진 않을까? 집이 무너질지도 몰라! "

" 걱정말거라. 그럴일은 없다. "


그의 신이 웃음이 아닌 놀란 표정을 짓는 이유는 창문을 연 히카루가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그의 신이 벌떡 일어났다. 뛰었다. 그것은 제가 존재한 이래 처음으로 행한 것 중 하나였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카루는 아이와 다름없이 열린 창문으로 발을 디뎠다. 창문과 땅의 거리는 멀지 않다. 창틀에 가벼운 발이 눌리지 않는다. 고개를 내밀어 그가 처음으로 얼굴에 빗방울을 맞을 적에, 아이는 이미 모든 것을 맞았다. " 히카루. " 잠잠한 꾸중이 아이를 돌아보게 한다. 내려앉은 발에 닿는 잎사귀가 축축하다. 눈 앞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웅덩이에 뛰쳐드는 히카루가 보인다. 쏟아지는 것과 다르게 튀겨난 것이 발에 묻는다. 머리를,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빗물이 눈 앞을 가린다. 그는 신이었다. 그는 제가 있는 곳에 내리는 비를 멈출수 있었다. 온 몸을 적시지 않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굳이 훔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을 보려면 눈을 찌푸려야 하는 불편함을 무릅쓰며 이마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굳이 정리하지는 않았다. 히카루가 걸음을 내딛는다. 수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히카루는 배가 주릴것이다. 그럼에도 히카루는 제게 주어진 활기를 발산하기에 바쁘다. 풀 숲에 몇번이고 다리가 긁힌다. 물웅덩이를 참방거리던 히카루는 제게 다가오는 사내에게 달려간다. 히카루가 있는 곳은 억센 풀이 있는 곳이다. 히카루는 아픈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의 다리에 매달려 긁힐 것을 개의치 않는다. 고개를 숙인 히카루가 묻는다.


" 재미있느냐? "

" 응. 웅덩이도 엄청, 많아. " 말을 하던 아이의 눈에 빗물이 떨어졌다. 히카루는 눈을 찌푸렸지만 짧은 말을 이어간다. 히카루는 제 손에 닿는 히카루의 눈을 문지른다. 고양된 아이의 볼이 맑게 붉다. 히카루의 몸에 달라붙은 옷은 얇다. 히카루가 무릎을 굽혀 아이의 얼굴을 살핀다. 빨간 볼과는 달리 입술이 파랗다. 속눈썹 위로 물방울이 일렁인다. 히카루가 작게 춥다고 말한다. 히카루가 한 손으로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의 몸은 차갑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 히카루가 받을 비는 그의 신의 머리에 떨어진다.


" 다음번에는 우비를 만들어주마. "

" 우비가 뭐야? " 이빨을 딱딱거리며 히카루가 물었다. 물에 불은 손이 허공을 허우적거린다. 방황하던 손이 잡은 것은 젖은 제 모포였다. 온기는 없을텐데, 히카루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을 히카루는 보지 못한다. 히카루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선다. 


" 비가 맞지 않게 몸을 덮는거란다. 자, 이제 들어가자. 몸이 차구나. "








히카루가 일어났다. 잠들던 아이의 숨이 아주 조금 가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은 모래알갱이들이 바람이 되듯이, 점차 커져간다. 히카루는 꺼진 초를 켠다. 불빛에 비침에도 아이의 얼굴에 열이 오른것이 보인다. 초를 손에 올려놓은 사내가 뒤로 물러난다. 바닥으로 촛농이 떨어진다. 히카루는 머리맡에 초를 두고 램프를 씌운다. 그는 땀이 맺힌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내려온 머리카락이 히카루의 손에 의해 넘겨진다. 닿은 이마에는 열이 있다. 일렁거리는 눈이 숨을 몰아쉬는 히카루를 내려다본다. 이마에 닿은 손이 떨어진다. 그는 신이었다. 사내가 일어선다. 그는 아이가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줄 수도 있었다. 또는 그의 능력으로 작은 열 정도는 내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통을 들었다. 그리고는 문을 나서 장대처럼 내리는 빗속을 걸어, 제 무릎까지 불은 시내의 물에 발을 담근다. 물살은 세찼지만 신이 넘어질 일은 없다. 다리에 부딪히고 갈라지는 물길들을 그는 한없이 바라본다. 그가 통에 물을 긴다. 물 아래 젖은 돌맹이의 냄새가 축축하다. 어린아이만큼의 무게가 통에 담긴다. 그가 뭍으로 발을 올린다. 그가 좋아하는 젖은 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지금은 그는 그것을 감상하고 싶지 않았다.


젖은 손이 나무를 만진다. 굽힌 손 끝을 피면 문이 소리없이 열린다. 그는 문이 열리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아이의 숨이 멎지 않았을까를 생각했다. 그가 나선 시간이 짧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에겐 생사를 넘나드는 시간이었을 지 모른다. 어쩌면 영겁만큼. 히카루의 시선이 열리는 문을 향한다. 정면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가라앉아있었다. 숨소리가 아직은 빗속에 가려 들리지 않는다. 히카루가 마침내 집 안에 들어서서, 이불을 꽁꽁싸맨 아이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표정이 부드러워진 신은 물통을 떨어뜨릴 뻔했다.


머리끝까지 덮은 모포를 벗긴다. 히카루가 웅크려있다. 그는 열오른 몸뚱이를 똑바로 눕히고, 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올려놓는다. 차가움에 히카루가 눈을 뜬다. 힘들어보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아. " 아이가 헛구역질을 한다. 히카루는 히카루의 고개를 들어 옆으로 뉘인다. 볼 옆에 자리한 손에 아이가 토했다. 히카루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다. 그저 다른 모포를 적셔 아이의 입가를 닦은 뒤 자신의 손을 닦는다. 아이의 배까지 모포를 덮는다. 추움에 떠는 히카루의 팔을 주무른다. 아프고, 졸릴 것이다. 아이의 얼굴은 비몽사몽이 따로 없다. 그는 자장가를 부르듯이 말한다. 아이의 사과나무와 까치발로 닿는 책장에 대해서. 오쿠다라는 아이의 코는 나았을 지를 혼잣말처럼 묻는다. 히카루가 훌쩍거린다. 그는 그것이 어쩐 이유인지 모른다. 히카루는 아이의 배를 쓰다듬는다. 제 손은 아직 차가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가 일순 몸을 떨었기 때문이다. 히카루는 제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닦을 힘도 없다. 그럼에도 제 배 위에 놓인 손을 힘없이 잡는다.  히카루는 이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다. " 별 보는것을 좋아하니? " 히카루가 잠든다. 평온하다. 어린 손은 그의 신처럼,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신은 새벽이 찾아온 것을 느낀다. 제 팔이 아프도록 주무른 아이의 몸이 따듯하다. 지저귐이 들린다. 하나, 둘. 그는 셀 수 있지만 아이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아이의 머리에 더 이상 물수건을 올려둘 필요가 없다. 신의 등으로 푸른빛이 비친다. 서늘하고, 맑다. 아이의 얼굴이 새벽빛만큼 빛난다. 그제서야 신은 다시 아이의 옆에 눕는다. 그가 눈을 감는다. 다음날을 위해 잠을 청하기 위함이다. 새의 지저귐이 멀어진다. 그 작은 침묵은 아침이 되자 제 몸위로 뛰어든 팔팔한 것에 의해 깨어진다. 피곤한 웃음이 부스스하다. 히카루는 조용히 날뛰는 소란을 기꺼이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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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