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28. 13:51

바닥을 덮은 풀은 여러번 색이 바뀐다. 그 풀을 밟는 것이 있다. 풀은 접힌다. 그리고 발을 떼낼 적에 다시 일어섰다. 기이한 일이다. 바람이 분다. 남자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그는 마치 친한 친구를 바라보듯이 오랫동안 하늘을 봤지만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없이 걸었다. 제가 걸었던 길을 돌아오는 길은 오래토록 길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그 넘어까지 신은 몇 번이고 하늘이 변하는 걸 본다. 다리가 아프고, 한 번도 헐떡인 적 없는 숨이 차올랐다. 이마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땀이 바닥에서 타올랐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다.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신은 고개를 젓는다. 그 대신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걸음을 멈춘다. 그는 몸을 반만 돌려 솟아오른 비석을 본다. 

" 마치 인간이 된 것 같구나. "


찬 바람이 분다. 나무 조각들이 뺨을 치며 날아간다. 생채기는 나지 않았지만 거칠게 튼 조각이 옅게 쓰라려 아프다. 신은 바람을 따라 걸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를 맡는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아주 멀지만 선명하게 들린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흙은 바람에 따라 분다. 히카루가 걸었던 발자국은 밟히고, 묻히고, 덮여 사라진지 오래였다. 신조차도 그걸 볼 수 없었다. 축축한 흙을 밟고 걸었다. 그의 나머지 평생을 살았던 곳으로. 먼 거리는 아니었다. 나무가 수없이 많은 곳이었다. 때로는 사방이 둘러쌓인 것 같지만 한 지점에서는 쭉 이어진 정면이 보이곤 했다. 제 배에 머리가 닿던 소년은 이 사실을 아주 조심스럽게, 비밀얘기를 하듯이 알려준 적이 있다. 신은 좁고 길게 트인 길을 본다. 익숙한 나무더미. 낡게 삐걱거리는 문이 멀리 보인다. 그와 자신은 그 집에서 수십년을 살았다. 완연히 다다르기까지 지나쳐야 할 나무는 8그루였다. 신은 눈을 감았다. 깜깜해진 앞. 그는 자신과 살았던 소년이었던 노인을 기억한다. 그는 아이이기도 했다. 이름을 물었을 때 바싹 마른 버석한 목소리는 명랑하게 답했다. 귀신에게 쥐어뜯겨 평생을 노랗게 물들여졌던 앞머리. 평범한 검은 머리. 목소리가 확연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은 두 그루를 지나쳤다. 맨 발. 그 순간,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사람이 잠깐 멈춰설 정도의 큰 바람이었다. 매달린 나뭇잎이 수없이 떨어졌다. 바닥을 가린 나뭇잎. 그 처럼, 그 순간에 땅은 누군가 손으로 그리는 것처럼 작은 아이의 발자국이 그려진다. 제가 내딛는 걸음보다 좁은 폭이다. 모든 나무를 지났다. 삐걱거리는 문은 기름을 칠한 듯이 말끔해져있고, 덜컹거리는 문잡이가 조여진다. 문은 열려있다. 신은 입구에 멈춰선다. 새 것같진 않지만 깔끔한 창문, 모닥불. 감은 눈 위로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 겹겹히 쌓인 모포. 옆으로 누군가 사용한 것처럼 구겨진 두 개. 한 쪽 벽에 붙어있는 바둑판과 위에 올려진 두 개의 통. 희미하게 녹색 빛을 띄고 가운데가 살짝 타 눌러붙은 식탁. 단단한 빛을 띄고 까끌하고 딱딱할 것 같은 나무바닥. 그러나 아이는 괜찮다고 말했다. 의자를 끌고, 찍힌 자국이 선명히 남은 바닥. 신이 눈을 떴다.


어린 히카루가 있다. 그는 신기한 듯이 바둑판 앞에 앉아 바둑알을 만지작대고 있다. 아이는 창문으로 부는 바람이 시원한 듯이 하늘을 내다본다. 히카루는 문기둥에 기대서서,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어설픈 손놀림으로 바둑알을 내려놓는다. 내려놓는 소리가 크다. 잠깐 손가락 끝에서 머물던 바둑알은 너무 힘을 준 탓에 튕겨나간다. 굴러나가는 바둑알. 아이가 일어선다. 뾰루퉁한 표정이었다. 신이 미소짓는다. 겨우 허벅지까지밖에 닿지 않는, 바둑돌을 놓을 줄도 모르는 저 아이는 언젠가 제 허리에 닿는 소년이 될 것이다. 성장에 따라 언젠가는 밤잠을 설쳐 제 등에 고갤 묻고 소리죽여 울고, 제 치기와 용기를 겁에 질려서도 내뱉을 줄 아는. 미련할 지는 몰라도 용감한 남자가 될 것이다. 바둑돌을 집는 모양이 고고하고, 제법 멋진 수를 둘 줄 아는 청년이 되고, 자리잡힌 주름은 어딘가 인자하면서도 장난스럽겠지. 바둑돌은 여전히 구르고 있다. 검은 돌이다. 구르는 소리는 제 발치 앞으로 다가온다. 아이는 제 앞까지 고개를 숙이고 다가와서, 돌을 집었다. 아이가 고개를 든다.


" 히카루? "


다시 눈을 떴다. 낡은 거미줄이 천장에 매달려있고, 장작은 바스라져 검은 재들이 바닥에 널려있다. 천장사이로 난 구멍에 스민 물이 녹색 빛깔의 곰팡이를 피운다. 창문으로는 옆으로 아주 큰 나무가 보인다. 가지로 한 메추라기가 날아와 앉는다. 새는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긴 시간을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다음 도약을 위해 머무르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새가 날아올랐다. 그것에 나무가 흔들렸다.


신이 기둥에 손을 댄 채로 천천히 몸을 숙인다. 무너져앉는다. 그는 아이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그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안는다. 하얀 돌을 들고 졸린 웃음을 짓던 아이, 두려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저를 껴안던 소년. 그는 얼굴을 묻은 손에 천천히 힘을 준다. 거울과 자신을 몇 번이고 번갈아보며 겸허한 표정을 짓던 청년. 그가 입을 크게 벌린다. 밥 투정을 하며 입을 내밀던 것. 언제부턴가 손 끝에, 이마에 단단히 박혀있던 주름. 그것이 신기해 몇 번이고 만지거든 싫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치운적은 없는 중년. 히카루와 만나고, 그와 행했던 모든 일들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단지 너무나도 아이가 그리웠다. 건방지지만 솔직하고, 순수하고, 용기있던. 그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어깨를 부축하거든 끌끌 하며 혀를 차던 어리고 어리던, 노인. 손가락 사이로 따듯한 게 흘러내릴 적에야 그는 제가 울고있다는 걸 알았다.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끝없이 울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크고 구슬퍼, 주변의 새들은 모든 나무에서 날아올랐다. 그리고 어떤 신에게도 그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꿈이 내려온다. 별들이 휘어진 나무틈새에 머물러있다. 신이 눈을 뜬다. 흘러내리는 별이 앞에 있었다. 신은 가만히 별을 보고, 들었다. 별은 형체를 가진듯이 움직인다. 신의 머리위에서 움직이는 건 마치 쓰다듬는 것처럼 보였다. 신은 눈을 감았다. 그는 몇 번이고 숨을 내쉰다. 모포 아래로 보이는 다리는 여전히 살점을 입었다. 천이 펄럭이며 하늘로 솟는다. 드러나야할 팔이 없었다. 뭉툭한 덩어리는 누군가 알아채기도 전에 덮여진다. 그는 한참후에야 입을 연다. 


" 여기가 좋다. "


우수수 쏟아진다. 빗물이 눈에 떨어지거나, 해를 정면으로 쳐다볼 때처럼, 눈을 뜨기 힘들정도로 버겁다. 신의 눈에 별이 어른거린다. 가끔씩 그는 해골의 형태로 변해, 그 별을 빈 머리속에 가득 채우곤 했다. 그러면 주전자가 삑삑 거리는것같은 소리가 났는데, 어떤 신이 웃는 소리였다. 그는 그 광경을 보며 즐거워했다. 신의 눈에서 눈물처럼 별이 흘러내린다. 머물지 못한 탓에 떨어진것이다. 일렁이는 별은 잡초를 태운다. 신이 곤란한 듯이 웃는다. 멀리멀리 떨어져 발길조차 닿지않던 무덤. 너무나 너무나 힘을 줘서 핏대가 불뚝 서있던 손. 솟아오른 흙더미를 파헤치듯 박혀있는 손가락. 무덤에 남겨진 신의 두 팔. 그제서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내가 원하면 어떻게 될까? 내 권한이 아니지. 그래, 알고말고. 난 기도하려는 것 뿐이다. 그리고 네가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너도 알지않니? " 그가 낮게 웃었다. 덩어리 진 별은 흩어지고 있었다. "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크지도 않지만 작지도 않지. 그래, 누군가는 내게도 그랬겠지. 그래. 네 말처럼. 난 마치 인간처럼 구는구나.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처럼. "





신은 서있다. 있는 힘껏 손을 펼쳐 제 손을 잡던 아이의 앞이다. 파헤쳐져 흠집난 자국을 돌볼 수 없는것만을 안타까워했다. 나뒹구는 두 손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든다. 그가 하늘을 보는 건 대부분 하늘의 색과, 그 위에서 노니던 다른 것들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번은 다른 경우다. 그는 더 높은 곳, 또는 아예 다른 종류의 먼 곳을 향한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이 눈 앞으로 지나간다. 햇빛은 마치 밝은 은행처럼, 갈색같다. 그는 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 난 솔직히 당신을 잘 몰라요. 들려오는 이야기들로만 그대를 들었어요. " 우수에 잠긴 것처럼 눈을 깜박인다. 얕고 소음없는 침묵이었다. 그는 차분히 말을 고르듯이, 다문 입을 다시 열었다. " 단지 바둑의 신이라 불리고, 계속해서 사는 것정도가 내 권한이지. 그 이상의 권능같은 게 내게는 없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들의 종교에서 최고라 불리던 제우스나 오딘보다 당신이 더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알려진 것 뿐이네요. "


신은 웃는다. 제가 신으로써의 권능을 크게 자각하고 바라거나, 우세를 부린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존대를 써본것자체도 처음이었다. 그것이 우습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권능이란 다른 것이다. 자신은 생명을 창조하거나 살릴만한 권한이 없다. 단지 부탁이었다. 


" 바라는 게 있어요. 살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어요. 이름이 꼭 다시 히카루가 아니어도 돼요. 생김새가 조금은 달라도 괜찮아요. 굳이 바둑을 두지 않더라도 상관없어요. " 


입을 다문다. 바라는 건 많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생명에 관련된 일에선 무게가 다르다. 그는 바둑의 신이었다. 권능을 가진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신으로서, 이 말을 꺼내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별, 사랑, 바람, 그리고 꿈의 신은 알았다. 그는 무거운 게 눈을 짓누르듯이 오래토록 눈을 감고 있었다. 아주 잠시 목이 메인다. 그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용기있던 아이. 히카루. 아이의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히카루와 같은 아이가 다시 태어나게 해주세요. "


제가 사라지더라도 바둑의 신은 언젠가 생겨나겠지. 태양의 신이 헬리오스에서 아폴론이 되고, 제우스가 제 아비를 몰아내고 최고의 신을 차지한 것처럼. 이름은 그대로거나 명칭이 다르지 않아도 수없이 바뀌었던 신들처럼. 다를 게 없을것이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거나, 하는 행동이 다르던지. 그 외에는 언제가 같을터다. 신은 집착하지 않았다. 신은 같다. 자신이 없더라도 같은 신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알았다. 히카루는 결코 히카루와 같은 이는 있을 수 없다. 그는 한번 더 발을 내딛는다. 묘비위에 올려진 맨 발. 그는 겸허히, 경건하게 사라져 흩날리는 제 몸을 본다. 조용히 기다리듯이. 바닥에 떨어졌던 팔마저 흩어질 적에, 그는 잊어버린 게 생각난 듯이 고개를 든다. 아. 그는 민망한듯이, 그러나 밝게 웃는다. 소리도 없이.


" 이건 개인적인 바람인데, 조금 건방졌으면 좋겠네요. "


묘비에 올려진 발자국은 선명히 남아있다.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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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울리에
2014. 11. 26. 00:04

손가락 끝은 부르터있을 때가 많다. 그 손 끝에 걸리는 하나의 주름이 여러개로 늘어나는 건 그의 기준에 순식간이었다. 손을 움직일적마다 얇고 부드러운 가죽이 접혔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난다. 의자 밑으로 흐르는 물과 나동그라지는 컵. 히카루는 잠드는 일이 많아졌다. 오래 전에 신이 만들었던 흔들의자는 어느새 늙은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이 되었다. 나뭇잎에 가려 옅게 비치는 녹색 빛. 꿈결처럼 비치는 빛에 바닥은 제 색을 띈다. 물을 따라 검은색으로 젖은 나무들 위에 히카루가 맨 발로 서 있다. 그는 제 배 언저리에 앉은 이를 내려다본다. 의자가 흔들리는 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바닥을 구르는 그릇. 히카루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가 단 한번도 짓지않은 표정처럼. 아무것도 없이 서 있었다.


 

멀리 나서지 않아도 문을 여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히카루는 집 주변을 걷고, 나무기둥에 기대어 앉거나 했다. 새 소리.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바람소리들. 언제나 듣고, 봐왔던 것들은 세월이 지나서야 다르게 다가온다. 신은 그를 따라나설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다. 히카루는 종종 바깥에서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땐 히카루가 옆에 있었다. 오랫동안 앉아있을 땐 다리가 굳을 때도 많았는데, 히카루는 굳게 입을 다물고 혼자 일어서려 할 때가 많았다. 손은 마디가 불거져있다. 그는 나무 벽을 짚고, 낮게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서곤 했다. 히카루는 언제나 히카루를 보고 있었고, 가끔씩 다음 걸음에서 그가 비틀거릴 적엔 그의 팔을 잡는다. " 조심하셔야죠, 어르신. " 히카루는 어느새부터인가 끌끌 거리며 혀를 찰 줄 알았다. 그러면 신은 우스운 듯이 웃었다.


나가야 할일, 나가도 될 일, 나가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러나 히카루는 오래토록 누워있었다. 눈을 돌렸다. 신은 엎드린 채 제 손등에 얼굴을 묻고 있다. 잠이 들은 터다. 히카루가 천장을 본다. 나무로 엮어진 모양이 언젠가는 조각같아 보였다. 눈을 깜박였다. 가끔씩 눈이 불편할 정도로 뿌옇게 끼는 습기가 달갑지만은 않다. 눈을 다시 깜박였다. 흩어지는 것처럼 소리가 들린다.


" 대국하겠느냐. "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렸다. 히카루는 눈만을 가늘게 뜬 채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천장이 바둑판처럼 보였다. 


" 13의 17. "

히카루는 먼저 말했다. 언제나 흑을 쥐는 건 제 쪽이다. 모든 대국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과의 대국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먼저 기다렸다. 언제나 그랬다. 신이 수를 둔다. 나른하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였다. 희미하게 눈 위로 떠다니던 작은 얼룩같이 흰 색과 검은색이 말에 따라 놓인다. 히카루는 예전에 제가 신과 둘 때 수를 번복했던 것을 기억한다. 돌을 집고, 신의 시선안에서 수를 두는 것이 어떤 때보다 긴장되던 순간이 있었다. 작은 손이 땀에 차 어설픈 손놀림으로 돌을 내려놓을 적, 아이는 돌을 미끄러뜨렸다. 손끝에서 퍼진 아슬아슬한 감각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숨이 멎는다. 손 끝이 저렸다. 아이는 고개를 들 틈도 없이 제 실수를 집어들었다. 제가 생각했던 곳에 놓은 그 순간에야 아이는 이변을 알아챘다. 고개를 든 순간이다. 등불에 비친 히카루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눈을 내리깐 채 소리없이 웃는. 앞머리에 가려 확연히 보이지 않았음에도 판이하게 달랐다. 아이는 말할 수 없었다. 심지가 다 타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남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이 꺼졌다. 캄캄한 어둠. 히카루는 히카루의 윤곽만을 본다. 모닥불을 켜는 법을 모른다. 등불도 마찬가지였다. 신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 널 하수로 보게하지 말거라. " 그는 단 한 마디만을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의 대국은 그걸로 끝이났다. 천장에 그려진 대국은 끝이 난지 오래였다. 그러나 신은 다시 수를 말했다. 히카루도 그처럼 했다. 아주 어릴적처럼, 바둑판을 가득 채운 수백개의 희고 검은 돌들. 히카루가 천장으로 손을 뻗는다. 창문이 열린다. 바둑돌이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제 이마에, 볼에, 손 틈에 떨어지는 바둑돌이 아프지는 않았다. 눈 앞으로 별이 분다. 히카루가 작게 말했다.


" 꿈을 꾸는 것 같아. "

히카루가 옆을 본다. 바둑돌은 머리맡에 수없이 늘어져있다. 모포자락에 떨어진 바둑돌은 상이하면서도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발바닥에 떨어진 바둑돌이 못내 간지러웠다. 히카루가 웃자 젊은 얼굴이 같이 웃었다. 몇 개야? 히카루가 묻자 신이 대답하고, 다시 대답했다.


" 꿈이 아니다, 애야. "

그는 틀린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말이 오간게 거짓말처럼 잠잠한 정적이 맴돌았다. 나무가 약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창문은 여전히 열려있다. 감추려해도 드러나는 것처럼, 창문틈새가 아주 희미하게 반짝거린다. 꿈만 같다. 신은 여전히 마루에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자고 있다. 정말 꿈만 같았다. 어릴 적 올려다보던 해골덩어리. 내리쬐는 듯한 햇빛에도 타지 않던 천조각. 뽑힐듯이 욱신거리던 머리와 발치 앞에 흩어진 머리카락들. 제 머리에 올려졌던 소름끼치던 뼛덩이. 눈부시도록 밝기 그지없는 햇볕을 등으로 받던 자신의 모습을 한 남자. 햇볕처럼 노랗게 빛나던 눈썹, 속눈썹, 눈, 손. 이게 꿈이라면, 다시 돌아간다면. 히카루가 숨을 내쉰다. 느릿하게 들리는 신의 숨소리. 히카루가 손을 내민다. 제가 내밀어 잡은 온건하게 따듯한 손. 창문을 덜컹거리게 하는 바람이 바닥을 쓸었다. 갑자기, 갑자기 아주 세찬 바람이 분다. 폭풍처럼 제가 올려다보던 나무천장들이 바스라지며 날아간다. 뺨에 닿는 바람이 밤이슬처럼 차갑다가, 여느 여름날의 젖었던 나무 그늘아래처럼 시원하고, 순간은 저녁노을을 받던 집 안처럼 미지근하다가, 정말 꿈처럼. 눈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 바람이 분다. 다시 눈 앞에 그 광경이 펼쳐진 거 같았다. 얇은 옷 위로 떨어지는 흙에서 올라오던 뜨거운 열기. 뜨겁고 뜨거워서 눈을 뜨지 못하던 제 앞을 가리는 것이 있다. 제 키보다 큰 사내의 그림자안에 있던 자신. 아른거리던 웃음이 내려온다. 사내가 제게 향해있던 고개를 들었다. 움직인다. 모포가 제 앞으로 펄럭이며 지나간다. 헤졌지만 때가 타지는 않았다. 옆으로 지나가던 손. 움직일 때마다 피어오르던 모래. 히카루는 자신을 지나간 신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달렸다. 발바닥에 닿는 모래가 뜨거웠고,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힘든 뜨거운 열기에도 달렸다. 신이 저와 같은 살점을 입었을 때, 자신은 신보다 많은 걸음을 걸어야했다. 모포 밑으로 보이는 손. 손을 펼치고, 손을 펼치고, 손을 펼치고!! 히카루는 다다라, 그 뒤에 멈춰서서, 그의 손을 잡았다. 신이 뒤돌았다. 그는 놀란 것처럼 보였다. " 네 이름이 뭐니? " 울리던 목소리. 연로한 목소리가 말했다.


" 히카루. "




히카루가 눈을 떴다. 엎드린 손에 차가운 기운이 맴돈다. 왜 찬 기운이 도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이함을 느끼는 채로, 그가 일어나 옆을 본다. 히카루가 있다. 그는 너무나 평온한 듯이 보인다. 히카루는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희게 새간 머리들을 그가 손으로 쓸었다. 자리잡힌 주름이 보인다. 그는 손가락으로 겹겹히 쌓인 살들을 만진다. 울퉁불퉁하게 손가락은 올라가고, 내려가는 걸 반복한다. 서늘했다. 히카루는 일어난다. 제 몸을 덮은 모포가 땅으로 흘러내리는 것에 개의치않는다. 그는 아주 어릴적 제 손을 잡으려 까치발을 한 아이였던 이를 본다. 그는 더 이상 보지 못한다. 뚫렸던 천장은 누가 보기도 전에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나무 새로 흘러내리는 별들. 언젠가 나이먹은 이는 별이 보고싶다 말했다. 그는 누워있었다. 신은 몸을 반쯤 일으켜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더니 일어났다. 히카루는 눈으로 그를 쫓고있었다. 신은 일어서서 단지 양 팔을 하늘로 뻗는다. 의미있는 동작이 아니다. 다문 입에 머물던 미소는 춤추는것 같다. 그가 팔을 벌림에 따라 헤어지던 나무들. 바람에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사라지던 천장사이로 별들이 수없이 떨어진다. 히카루의 눈이 놀란것처럼 커진다. 수십, 수백, 아니 셀 수 없이 유성우처럼 떨어지던 별들. 땅으로 박히는 별들은 땅에 스며든 채 반짝거리는 빛을 내고, 어미의 귓가에 옹알거리는 아이처럼 소근거리는 소리를 냈다. 별이 늙은 이의 얼굴에 닿는다. 그는 졸린 것처럼 보였다. " 좋은 꿈 꾸거라. " 그는 지금처럼 눈을 감았었다. 뒤집힌 꽃잎의 색깔이 다른 것처럼. 장면이 바뀐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적막하게 들린다. 히카루는 한참동안이나 그를 보고 있다. 정적, 정적. 시끄럽게 제 힘을 내던 오래된 벗은 힘을 잃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나서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남자의 이마에 입술을 댄다. 흰 머리카락이 제 볼에 닿는다. 억세다. 뻣뻣하기도 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Posted by 아울리에
2014. 11. 25. 11:57

나무를 누르는 무게가 어느덧 무겁다. 뼈 위로 덮인 살이 이전보다도 올곧다. 접히는 살이 낡다. 나무판위로 돌을 내려놓는 소리가 난다. 묵직한 소리. 손이 두텁다. 떠나려는 발길이 멎은 지 오래다. 히카루는 히카루와 바둑을 둘 때, 몇 번이고 바둑돌을 더듬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땀에 찬 듯이 손을 몇 번이나 바르작대며 산만한듯이. 그러나 제 앞의 사람은 돌을 집어들고, 놓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이제 히카루를 상대로도 제법 큰 집을 차지하는 법을 알았다. 신은 수를 둘 때, 다급한 경우가 없었다. 불 위에 올려놓은 물은 아주 천천히 끓는다. 그는 멈춘 적 없이, 다른 모든 이와 두는 바둑과 다르게 대국을 한다. 탁. 돌이 떨어지는 소리. 그 소리의 근원지를 쫓아가거든 그의 신은 어떤 모습이거든 웃고 있었다. 히카루는 아직 단 두 번의 모습뿐이 보지 못했다. 안정되고 평온한 대국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가 내민 수에 처음으로 손을 멈췄다. 히카루는 바로 고개를 드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하나, 둘. 세번째까지 세었을 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들어도 익숙치않던 목소리가 눈 앞의 대상을 부른다. 날이 밝았음에도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순간부터 가끔씩 앞이 희뿌이게 보일때가 있었다. 눈을 찌푸려야만 완연하게 앞이 보이곤 했다. 히카루는 그렇게 했다. 신이 있었다. 단지, 정말로 신이 있었다.


"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바둑을 두었지. 네가 세어왔던 그 모든 수보다 많은 돌을 집고 내려놓고. 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쳤다. 히카루. " 그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히카루는 고요히 접히는 신의 눈을 보았다. 히카루는 제가 견뎌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당황한 사람들이 눈을 꾹 감고 웃던 것들을 기억한다. 마치 그처럼 신이 웃었다. " 내겐 잘 둔다. 못 둔다라는 정의가 없다, 히카루. 네가 말한 것에 완벽하게 대답하지 않은 이유가 그렇단다. " 신이 부드럽게 히카루를 본다.


" 이상한 표정을 짓는구나. "

"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


히카루는 고개를 으쓱했다. 그의 손에 언제부터인가 흰 돌이 쥐어져있었다. 히카루는 그가 돌을 집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엄지와 검지사이에 끼운 돌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더니, 아주 빠르게 돌을 내리치듯이 내려놨다. 귀를 울릴 큰 소리가 날 줄 알았다. 히카루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의외로 어떤 소리도 나지않았다. 수를 내려놓거든 답을 하는 것이 바둑이었다. 그러나 히카루는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엄중하고 거대한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 누가 이겼느냐? 히카루. " 

" 히카루. "

" 나는 바둑을 두는 법은 알지만 승패라는 것조차 모르던 때가 있었다. 너는 마치 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다른 것일 뿐이지. "


히카루가 일어났다. 그는 바둑판을 밀어놓은 채 어느순간부터 헤진 가죽조끼를 벗었던 남자의 앞에 앉았다.  " 늙었구나. " 그의 주름을 만지며 한 말이다. 그는 놀라, 신기한 것을 보듯이 묘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진지한 우러름처럼 보였다.


" 히카루. 나는 너와의 대국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

Posted by 아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