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덮은 풀은 여러번 색이 바뀐다. 그 풀을 밟는 것이 있다. 풀은 접힌다. 그리고 발을 떼낼 적에 다시 일어섰다. 기이한 일이다. 바람이 분다. 남자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그는 마치 친한 친구를 바라보듯이 오랫동안 하늘을 봤지만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없이 걸었다. 제가 걸었던 길을 돌아오는 길은 오래토록 길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그 넘어까지 신은 몇 번이고 하늘이 변하는 걸 본다. 다리가 아프고, 한 번도 헐떡인 적 없는 숨이 차올랐다. 이마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땀이 바닥에서 타올랐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다.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신은 고개를 젓는다. 그 대신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걸음을 멈춘다. 그는 몸을 반만 돌려 솟아오른 비석을 본다.
" 마치 인간이 된 것 같구나. "
찬 바람이 분다. 나무 조각들이 뺨을 치며 날아간다. 생채기는 나지 않았지만 거칠게 튼 조각이 옅게 쓰라려 아프다. 신은 바람을 따라 걸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를 맡는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아주 멀지만 선명하게 들린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흙은 바람에 따라 분다. 히카루가 걸었던 발자국은 밟히고, 묻히고, 덮여 사라진지 오래였다. 신조차도 그걸 볼 수 없었다. 축축한 흙을 밟고 걸었다. 그의 나머지 평생을 살았던 곳으로. 먼 거리는 아니었다. 나무가 수없이 많은 곳이었다. 때로는 사방이 둘러쌓인 것 같지만 한 지점에서는 쭉 이어진 정면이 보이곤 했다. 제 배에 머리가 닿던 소년은 이 사실을 아주 조심스럽게, 비밀얘기를 하듯이 알려준 적이 있다. 신은 좁고 길게 트인 길을 본다. 익숙한 나무더미. 낡게 삐걱거리는 문이 멀리 보인다. 그와 자신은 그 집에서 수십년을 살았다. 완연히 다다르기까지 지나쳐야 할 나무는 8그루였다. 신은 눈을 감았다. 깜깜해진 앞. 그는 자신과 살았던 소년이었던 노인을 기억한다. 그는 아이이기도 했다. 이름을 물었을 때 바싹 마른 버석한 목소리는 명랑하게 답했다. 귀신에게 쥐어뜯겨 평생을 노랗게 물들여졌던 앞머리. 평범한 검은 머리. 목소리가 확연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은 두 그루를 지나쳤다. 맨 발. 그 순간,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사람이 잠깐 멈춰설 정도의 큰 바람이었다. 매달린 나뭇잎이 수없이 떨어졌다. 바닥을 가린 나뭇잎. 그 처럼, 그 순간에 땅은 누군가 손으로 그리는 것처럼 작은 아이의 발자국이 그려진다. 제가 내딛는 걸음보다 좁은 폭이다. 모든 나무를 지났다. 삐걱거리는 문은 기름을 칠한 듯이 말끔해져있고, 덜컹거리는 문잡이가 조여진다. 문은 열려있다. 신은 입구에 멈춰선다. 새 것같진 않지만 깔끔한 창문, 모닥불. 감은 눈 위로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 겹겹히 쌓인 모포. 옆으로 누군가 사용한 것처럼 구겨진 두 개. 한 쪽 벽에 붙어있는 바둑판과 위에 올려진 두 개의 통. 희미하게 녹색 빛을 띄고 가운데가 살짝 타 눌러붙은 식탁. 단단한 빛을 띄고 까끌하고 딱딱할 것 같은 나무바닥. 그러나 아이는 괜찮다고 말했다. 의자를 끌고, 찍힌 자국이 선명히 남은 바닥. 신이 눈을 떴다.
어린 히카루가 있다. 그는 신기한 듯이 바둑판 앞에 앉아 바둑알을 만지작대고 있다. 아이는 창문으로 부는 바람이 시원한 듯이 하늘을 내다본다. 히카루는 문기둥에 기대서서,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어설픈 손놀림으로 바둑알을 내려놓는다. 내려놓는 소리가 크다. 잠깐 손가락 끝에서 머물던 바둑알은 너무 힘을 준 탓에 튕겨나간다. 굴러나가는 바둑알. 아이가 일어선다. 뾰루퉁한 표정이었다. 신이 미소짓는다. 겨우 허벅지까지밖에 닿지 않는, 바둑돌을 놓을 줄도 모르는 저 아이는 언젠가 제 허리에 닿는 소년이 될 것이다. 성장에 따라 언젠가는 밤잠을 설쳐 제 등에 고갤 묻고 소리죽여 울고, 제 치기와 용기를 겁에 질려서도 내뱉을 줄 아는. 미련할 지는 몰라도 용감한 남자가 될 것이다. 바둑돌을 집는 모양이 고고하고, 제법 멋진 수를 둘 줄 아는 청년이 되고, 자리잡힌 주름은 어딘가 인자하면서도 장난스럽겠지. 바둑돌은 여전히 구르고 있다. 검은 돌이다. 구르는 소리는 제 발치 앞으로 다가온다. 아이는 제 앞까지 고개를 숙이고 다가와서, 돌을 집었다. 아이가 고개를 든다.
" 히카루? "
다시 눈을 떴다. 낡은 거미줄이 천장에 매달려있고, 장작은 바스라져 검은 재들이 바닥에 널려있다. 천장사이로 난 구멍에 스민 물이 녹색 빛깔의 곰팡이를 피운다. 창문으로는 옆으로 아주 큰 나무가 보인다. 가지로 한 메추라기가 날아와 앉는다. 새는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긴 시간을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다음 도약을 위해 머무르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새가 날아올랐다. 그것에 나무가 흔들렸다.
신이 기둥에 손을 댄 채로 천천히 몸을 숙인다. 무너져앉는다. 그는 아이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그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안는다. 하얀 돌을 들고 졸린 웃음을 짓던 아이, 두려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저를 껴안던 소년. 그는 얼굴을 묻은 손에 천천히 힘을 준다. 거울과 자신을 몇 번이고 번갈아보며 겸허한 표정을 짓던 청년. 그가 입을 크게 벌린다. 밥 투정을 하며 입을 내밀던 것. 언제부턴가 손 끝에, 이마에 단단히 박혀있던 주름. 그것이 신기해 몇 번이고 만지거든 싫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치운적은 없는 중년. 히카루와 만나고, 그와 행했던 모든 일들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단지 너무나도 아이가 그리웠다. 건방지지만 솔직하고, 순수하고, 용기있던. 그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어깨를 부축하거든 끌끌 하며 혀를 차던 어리고 어리던, 노인. 손가락 사이로 따듯한 게 흘러내릴 적에야 그는 제가 울고있다는 걸 알았다.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끝없이 울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크고 구슬퍼, 주변의 새들은 모든 나무에서 날아올랐다. 그리고 어떤 신에게도 그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꿈이 내려온다. 별들이 휘어진 나무틈새에 머물러있다. 신이 눈을 뜬다. 흘러내리는 별이 앞에 있었다. 신은 가만히 별을 보고, 들었다. 별은 형체를 가진듯이 움직인다. 신의 머리위에서 움직이는 건 마치 쓰다듬는 것처럼 보였다. 신은 눈을 감았다. 그는 몇 번이고 숨을 내쉰다. 모포 아래로 보이는 다리는 여전히 살점을 입었다. 천이 펄럭이며 하늘로 솟는다. 드러나야할 팔이 없었다. 뭉툭한 덩어리는 누군가 알아채기도 전에 덮여진다. 그는 한참후에야 입을 연다.
" 여기가 좋다. "
우수수 쏟아진다. 빗물이 눈에 떨어지거나, 해를 정면으로 쳐다볼 때처럼, 눈을 뜨기 힘들정도로 버겁다. 신의 눈에 별이 어른거린다. 가끔씩 그는 해골의 형태로 변해, 그 별을 빈 머리속에 가득 채우곤 했다. 그러면 주전자가 삑삑 거리는것같은 소리가 났는데, 어떤 신이 웃는 소리였다. 그는 그 광경을 보며 즐거워했다. 신의 눈에서 눈물처럼 별이 흘러내린다. 머물지 못한 탓에 떨어진것이다. 일렁이는 별은 잡초를 태운다. 신이 곤란한 듯이 웃는다. 멀리멀리 떨어져 발길조차 닿지않던 무덤. 너무나 너무나 힘을 줘서 핏대가 불뚝 서있던 손. 솟아오른 흙더미를 파헤치듯 박혀있는 손가락. 무덤에 남겨진 신의 두 팔. 그제서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내가 원하면 어떻게 될까? 내 권한이 아니지. 그래, 알고말고. 난 기도하려는 것 뿐이다. 그리고 네가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너도 알지않니? " 그가 낮게 웃었다. 덩어리 진 별은 흩어지고 있었다. "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크지도 않지만 작지도 않지. 그래, 누군가는 내게도 그랬겠지. 그래. 네 말처럼. 난 마치 인간처럼 구는구나.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처럼. "
신은 서있다. 있는 힘껏 손을 펼쳐 제 손을 잡던 아이의 앞이다. 파헤쳐져 흠집난 자국을 돌볼 수 없는것만을 안타까워했다. 나뒹구는 두 손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든다. 그가 하늘을 보는 건 대부분 하늘의 색과, 그 위에서 노니던 다른 것들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번은 다른 경우다. 그는 더 높은 곳, 또는 아예 다른 종류의 먼 곳을 향한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이 눈 앞으로 지나간다. 햇빛은 마치 밝은 은행처럼, 갈색같다. 그는 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 난 솔직히 당신을 잘 몰라요. 들려오는 이야기들로만 그대를 들었어요. " 우수에 잠긴 것처럼 눈을 깜박인다. 얕고 소음없는 침묵이었다. 그는 차분히 말을 고르듯이, 다문 입을 다시 열었다. " 단지 바둑의 신이라 불리고, 계속해서 사는 것정도가 내 권한이지. 그 이상의 권능같은 게 내게는 없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들의 종교에서 최고라 불리던 제우스나 오딘보다 당신이 더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알려진 것 뿐이네요. "
신은 웃는다. 제가 신으로써의 권능을 크게 자각하고 바라거나, 우세를 부린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존대를 써본것자체도 처음이었다. 그것이 우습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권능이란 다른 것이다. 자신은 생명을 창조하거나 살릴만한 권한이 없다. 단지 부탁이었다.
" 바라는 게 있어요. 살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어요. 이름이 꼭 다시 히카루가 아니어도 돼요. 생김새가 조금은 달라도 괜찮아요. 굳이 바둑을 두지 않더라도 상관없어요. "
입을 다문다. 바라는 건 많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생명에 관련된 일에선 무게가 다르다. 그는 바둑의 신이었다. 권능을 가진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신으로서, 이 말을 꺼내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별, 사랑, 바람, 그리고 꿈의 신은 알았다. 그는 무거운 게 눈을 짓누르듯이 오래토록 눈을 감고 있었다. 아주 잠시 목이 메인다. 그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용기있던 아이. 히카루. 아이의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히카루와 같은 아이가 다시 태어나게 해주세요. "
제가 사라지더라도 바둑의 신은 언젠가 생겨나겠지. 태양의 신이 헬리오스에서 아폴론이 되고, 제우스가 제 아비를 몰아내고 최고의 신을 차지한 것처럼. 이름은 그대로거나 명칭이 다르지 않아도 수없이 바뀌었던 신들처럼. 다를 게 없을것이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거나, 하는 행동이 다르던지. 그 외에는 언제가 같을터다. 신은 집착하지 않았다. 신은 같다. 자신이 없더라도 같은 신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알았다. 히카루는 결코 히카루와 같은 이는 있을 수 없다. 그는 한번 더 발을 내딛는다. 묘비위에 올려진 맨 발. 그는 겸허히, 경건하게 사라져 흩날리는 제 몸을 본다. 조용히 기다리듯이. 바닥에 떨어졌던 팔마저 흩어질 적에, 그는 잊어버린 게 생각난 듯이 고개를 든다. 아. 그는 민망한듯이, 그러나 밝게 웃는다. 소리도 없이.
" 이건 개인적인 바람인데, 조금 건방졌으면 좋겠네요. "
묘비에 올려진 발자국은 선명히 남아있다.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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